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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26년> 정보, 피로 쟁취한 '민주화'

by givermarket 2025. 4. 18.

 

1. 영화 <26년> 정보 및 줄거리

영화 <26> 2012년 개봉한 대한민국의 영화로, 강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심각한 일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잊기 마련입니다. 강풀 작가는 아무도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웹툰으로 꾸준히 써내려갔고, 결국 그 이야기는 영화화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 <26년.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인 1980 5월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후폭풍을 배경으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 영화는 가상의 복수를 다루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당시의 아픔과 정의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습니다1980 5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발생한 군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많은 시민이 희생당했습니다.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2006, 과거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당시 광주 학살의 책임자였던 전직 대통령, '그 사람'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이들의 계획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당시 학살의 책임자를 법적으로 처단할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한 정의구현을 목표로 합니다. 각자의 아픔을 안고 함께하는 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치밀한 작전을 펼칩니다. 그러나 학살 책임자를 처단하기 위한 작전 실행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갈등이 심해지기도 합니다. 작전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갈등과 위기가 발생하면서 영화는 긴장감을 더합니다.

 

 

 

2. 피로 쟁취한 '민주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사이에 한국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바로 5·18 민주화운동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79년 10월에 박정희 대통령과 가장 가까이 있던 인물 중 한 명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된 뒤 일어났습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사망했을 때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열망해 온 민주주의 시대가 찾아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또 다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상황에 격분한 전국의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와 반정부 시위를 벌였습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은 전국적인 계엄령 확대에 격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쿠데타를 주도한 새로운 군사정부는 대학생과 시민들이 이끄는 평화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 공수특전단을 광주로 급파하였습니다. 그 군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무자비하게 민간인인 시민들을 공격하였습니다. 그 같은 공격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시위에 참가하게 됩니다. 시위 닷새째 되던 1980년 5월 21일, 군인들은 엄청난 저항을 받아 시 외곽으로 밀려나기 전 시민에게 발포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광주는 5월 27일 군인들이 다시 진입하기까지 그들에게 포위된 채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통신도 단절되는 바람에 다른 지역과 고립됩니다. 봉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자치적으로 도시 청소를 하고 상점을 여는 등 일상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적절한 행정이나 치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 건의 강도나 도난 사건이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5월 27일 이른 아침이 되자 군인들이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도시를 난폭하게 들쑤셔 놓았습니다. 항쟁 10일 동안 광주와 주변 지역에서 165명의 시민이 사망하였고, 76명이 실종되었고, 3,383명이 부상당하였으며, 1,476명이 체포되는 등 총 5,100명이 연루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02명은 포위 당시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피해자들로부터는 환청·몽유병·강박행동 등의 정신 질환을 겪는다는 보고가 많았습니다. 그들 사이에 이혼과 자살 비율이 특히 더 높았던 것은 그 일을 직접 겪은 사람들이 신체적·정서적 충격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여러 해 동안 군사정부는 1980년 5월의 그 충격적인 사건에 관하여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분노의 외침으로 촉발된 대규모 민주화 투쟁에 의해 1987년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고, 1989년 ‘광주 사태’라는 명칭이 대통령에 의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개칭되었습니다. 1995년에는 가해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5029호)이 국회에서 제정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폭력진압에 책임이 있던 두 전직 대통령과 고위 관리들에 대한 사법적 조치가 시작되었습니다(1997년 4월에 대법원 선고가 있었습니다.). 이어 폭동 혐의로 중형을 선고받았던 항쟁 참가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1990년에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시작됐고(법 4266호) 1997년에는 5월 18일이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지정되게 됩니다. 2002년에는, 5·18 민주화운동 때 사용된 묘지가 국립묘지가 되었으며 피해자들은 국가유공자로서 수혜 자격을 얻었습니다.